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순왕후(조선 영조) (문단 편집) === 임오화변 전후의 정순왕후 === '''흔히들 정순왕후가 [[사도세자]]를 모함해 [[임오화변]]이 일어났다고 여기는데, 그것은 절대 아니며 상식적으로도 불가능하다.''' [[사도세자]]가 [[뒤주]]에 갇힐 때 정순왕후는 '''궁에 들어온 지 3년 정도 밖에 되지 않은 어린 18세 [[소녀]]'''였으며, [[사도세자]]를 모함하긴 커녕 [[사도세자|세자]]와 관계된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다. 아무리 [[영조|왕]]의 정실부인인 [[왕비|중전]]이였다고 하지만 [[왕세손|왕손]]을 낳은것도, 입궁한지 오랜 시간이 흐른것도 아니였기 때문에 가정까지 있는 [[사도세자|왕세자]]를 [[모함]]하는것 자체가 [[폐위|폐비]]감이며, [[임오화변]] 당시에도 [[영조]]는 [[사도세자|세자]]의 생모인 [[영빈 이씨]]와 상의했지 명색에 중전인 정순왕후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. 정순왕후가 입궐한 그 시점에서 이미 [[사도세자]]와 [[영조]]의 관계는 정말 파탄난 상태였다. 이론적으로 [[영조]]는 당시 정순왕후와의 사이에서 [[자식|후사]]를 볼 수는 있긴 했다. 그러나 [[영조]]에게는 이미 [[사도세자|장성한 아들]]과 손자들([[정조(조선)|정조]], [[은언군]], [[은신군]], [[은전군]])이 이미 있었다. 이미 [[중종(조선)|중종]]과 [[선조(조선)|선조]]가 [[인종(조선)|왕]][[광해군|세자]]가 있는데 새로 [[문정왕후|왕]][[인목왕후|비]]를 뽑고 그 사이에서 또 [[명종(조선)|아]][[영창대군|들]]을 낳았다가 사후 [[을사사화]], [[계축옥사]]가 일어난 전례를 생각해보면, 정순왕후 입장에서 [[영조]]와의 사이에서 [[자식|후사]]를 낳길 바라는 건 그렇다쳐도[* [[조선/왕사|왕]]의 [[자식]]을 낳는 것이야말로 [[사도세자|세자]]보다 나이 어린 중전으로서, [[내명부]]의 입지를 키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 어쩔 수 없기도 하다. 심지어 이것마저 정순왕후가 [[자식]]을 낳길 간절히 바랐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.] [[사도세자]]를 모해해서 얻을 이익 자체가 없었다.[* [[문정왕후]]나 [[인목왕후]]도 [[인종(조선)|인종]]과 [[광해군]]을 죽이려고 시도했던 적은 없었다. 이쪽은 [[왕세자]]가 없어지면 [[명종(조선)|자기]] [[영창대군|아들]]이 차기 [[왕세자]]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. 하물며 정순왕후는 자기 소생 아들도 없으니 [[사도세자]]를 죽인다 한들, 아무런 이득도 볼 게 없는데 상식적으로 그런 [[무리수]]를 둘 이유가 전혀 없다.] 거꾸로 [[왕비]]로서 [[사도세자]]를 보호, 옹호한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도 사실이긴 하다. 하지만 이는 앞서 말한 당시 정순왕후의 미약한 영향력을 생각하면, 정상참작을 하고도 남을만한 일이다. [[조선/왕실|왕실]] 인사 중 그나마 목소리를 낼 만한 인사인 [[혜경궁 홍씨|세자빈 홍씨]]와 [[사도세자|세자]]의 친모인 [[영빈 이씨]]도 상황을 차마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으며, 심지어 [[사도세자]]의 친모인 [[영빈 이씨]]는 [[영조]]에게 [[사도세자|세자]]를 대처분(죽이라)을 고하며 [[정조(조선)|세손]]만이라도 살리는데 급급한 판국이였다. 이런 상황에서 정순왕후가 아무리 [[왕비|중전]]이라고 해도 뭘 어찌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.[* 역으로 [[영조]]의 의지가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목전의 [[조선/왕사|계승자]]인 [[사도세자]]를 모해할 생각조차 못한다는 게 당시의 현실이었다. 한 예로 [[영조]]가 [[나경언]]의 고변을 접하고 '한 사람도 [[사도세자|세자]]의 비행을 내게 고하지 않았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은가?'라고 화낼 정도로, 조정 대신들([[노론]]이나 [[소론]] 등 당파를 가릴 것 없이) 모두가 모함은 커녕 [[사도세자]]의 비행을 감추느라 바빴다. 실제로 [[사도세자|세자]]가 벌인 비행도 숨기는 와중에 누명을 씌워서 모함했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다.] 심지어 [[조선/왕실|왕실]]의 예민한 부분인 [[사도세자]] 관련은 고사하고 [[영조]]의 총애를 받던 '''[[성관계|승은]][[상궁]][* 이계흥의 누이 이상궁. 끝까지 [[후궁]]에 봉해지지도 못하고 이상궁으로만 기록되었다. 정순왕후의 오빠인 [[김귀주]]가 [[세자빈]]인 [[혜경궁 홍씨|혜경궁]]의 [[풍산 홍씨|집안]](즉, 정조의 외가)을 공격하는 편지를 올리자, 정순왕후에게 "댁에서 감히 이런 일을 하실까 싶으니이까. 물 떠다가 편지를 씻어버리소서"라고 했다고.], 즉 [[후궁]]으로도 봉해지지 못한 정5품 상궁 나부랭이가 품계를 초월한 [[왕비|중전]]에게 기어올랐던 기록'''이 남아있다. 저 [[성관계|승은]][[상궁]]이 대들었다는 일화가 기록되어 있는 때가 [[임오화변]]이 일어나기 1년 전([[1761년]], 영조 37년)쯤인 걸 보면, 당시의 정순왕후는 남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자시고를 떠나 본인 입지를 구축하는데 급급했을 것이라는 쪽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. '''[[노론 음모론|노론 음모론자]]들은 [[벽파]]가 [[사도세자]]의 [[임오화변|죽음]]을 방조, 묵인한 혐의가 있다고 우기지만 이조차도 말이 안 된다. [[영조]]가 [[사도세자]]를 사사할 때 [[벽파]]라는 당파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고, 훗날 [[벽파]]가 되는 사람들도 전부 [[사도세자]] 사사에 별반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었다.''' 오히려 [[벽파]]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[[김종수(조선)|김종수]], [[심환지]]의 청명당은 [[정조(조선)|정조]]의 지지세력이자 외척(특히 [[풍산 홍씨]])의 반대세력이었다. 결과론적인 얘기이지만 [[사도세자]]는 영조 38년([[1762년]])에 죽었으나 정순왕후의 [[경주 김씨]] 가문은 영조 46년([[1770년]]) 무렵이 되어야 발흥했다. 진짜 [[사도세자]]의 [[임오화변|죽음]]에 정순왕후가 개입했다면 그 가문이 8년이나 늦게 뜰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? 오히려 [[홍봉한]]의 [[풍산 홍씨]] 가문은 [[임오화변]]의 [[사도세자]] 사사 이후 더욱 발판삼아 기세가 등등해졌다. [[홍봉한]]은 [[임오화변]]에서 사위인 [[사도세자]]를 거의 매몰차게 손절하고, 외손자인 [[정조(조선)|세손]]의 보호자(후견인)를 자처하는데 앞장선 대표적인 행위자였다. [[노론 음모론]]에 기반한 낭설에서는 정순왕후가 늙은 [[영조]]보다는 젊은 [[사도세자]]에게 매력을 느껴서 그를 [[유혹]]하려다가 거절당한 후에, 앙심을 품었다는 [[그리스 신화]]에 나올 법한 얘기도 있지만 당연하게도 전혀 근거 없는 [[헛소리]]다. 그럴려면 일단 목숨이 날아가고 가문이 풍비박산날 것을 예상해야 할 일인데 미쳤다고 [[역린]]을 건드릴 짓을 하겠는가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